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모리 오가이 (문단 편집) == 기타 == * 일본 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모리 오가이는 뛰어난 소설가로서 매우 잘 알려져 있으나, 문학사 관련 서적에서 그의 군의관 시절의 실책이 나와 있는 책은 거의 없기 때문에 모리 오가이를 뛰어난 소설가로서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실책은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군의관일 때는 그의 본명인 '모리 린타로'를 사용했는데, 이 때문에 둘이 동일인물인지 모르는 사람도 꽤 된다. * 문인으로서의 자신과 군인으로서의 자신을 엄격하게 구분했다고 한다. 하루는 문단의 친구가 군복을 입고 정거장에 있던 모리 오가이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건네자 크게 호통을 쳤다고 한다.[* 모리 오가이는 중장 계급에 해당하는 군의 총감이었다.] * 잠을 짧게 자는 편이었다. 지인들에게 "2시간 잔 거면 많이 잔 거다"라고 말했을 정도. * 논쟁광이었다. 모리의 이러한 점이 당시 일본 의학에 존재했던 봉건적 분위기를 타파하는 데에 이바지했다는 평이 있기도 하다. * 모리 오가이의 굴욕 : [[군인]]으로서 자긍심이 높아서 산책할 때도 항상 군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하루는 딸 안느와 함께 산책을 하고 있자니, 아이들이 "우와, 중장이 걷고 있네" 라며 몰려들었다. 당시는 러일 전쟁 직후라 군인이 어린 아이들에게 영웅처럼 생각되던 때였다. 그런데 뽐내는 얼굴로 서 있던 모리 오가이의 옷깃의 녹색 단추를 보고는 한 아이가 "뭐야, 군의관이잖아" 라고 김 샜다는 듯이 말했고, 다른 아이들도 그 말을 듣고는 그대로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이 때문에 상심한 모리 오가이는 집에 돌아올때까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위키피디아 및 여러 웹 사이트 교차 참고. 딸 안느의 회고록에서 인용했다고 한다.] ~~아니 군의관이 뭐 어때서~~ * 세균학을 주로 전공했던 탓에 [[결벽증]]에 걸려 [[과일]]조차도 끓이거나 데쳐서 먹어야만 했고, 남이 들어갔던 목욕탕에 들어가는 것도 매우 꺼렸다고 한다. [[다니구치 지로]]의 [[도련님의 시대]]에 보면 모리 오가이는 업무가 끝난뒤 입욕을 습관화하지 않고 한숨 자고나서 온몸에 데운 물에 적신 깨끗한 수건으로 온몸을 닦았는데 다도를 하듯 흐트려지지 않고 경건하게 하고 면도를 하고 책을 새벽까지 읽는 습관을 가졌다. --하지만 정작 폐[[결핵]]으로 사망했으니... 그것 참...-- * 탈아입구 광풍이 불던 시절의 독일 유학파였던 탓에 [[옥시덴탈리즘|서양 문화를 매우 동경했고]], 심지어 아이들 이름조차도 서양식으로 지었다. 그의 첫째 아들의 이름은 오토(於菟)(=Otto, 오토), 첫째 딸의 이름은 마리(茉莉=Marie), 둘째 아들의 이름은 루이(類=Louis), 둘째 딸의 이름은 안느(あんぬ=Anne)였다. 심지어 그의 손자 중 하나의 이름도 그가 지었는데 유리아(由利亞=Julia). 즉 차례대로 풀네임을 말하자면, 모리 오토, 모리 마리, 모리 루이, 모리 안느, 모리 유리아. 그의 장남도 그런 성격을 이어 받았는지, 장남 오토의 자식들은 각각 森真章(모리 막스), 森富(모리 톰), 森礼於(모리 레오), 森樊須(모리 한스), 森常治(모리 죠지)였다. 지금 기준으로도 훌륭한 [[DQN네임]]이다. * 군의관 시절에 벌인 각기병 대책 관련 병크에도 불구하고 군의 총감까지 승진하고 있던데는 육군내 [[조슈 번|쵸슈]] 군벌의 대부인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후원이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적어도 독일 유학시에는 유학 제한 연령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야마가타의 압력으로 인해 유학갈 수 있었다는 점은 이러한 논의가 추정임에도 불구하고 거의 진실처럼 통용되게 한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를 그렇게 존경하고 그처럼 소설을 쓰고자 갈망했다고 한다. 하지만 소설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를 강조했던 모리 오가이에 비해, 아쿠타가와는 개인성과 심리 묘사를 중시하는 등, 소설로 하려고 했던 일이 너무나도 판이했고, 실제로 만난 적도 별로 없다고 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존경해왔던 모리 오가이 식의 소설은 현대 일본 문학에는 생명력을 다했다는 평가이지만, 아쿠타가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특징. * [[다자이 오사무]] 또한 모리에게 감화된 작가이다. 모리가 번역한 독일 소설 "여인의 투쟁"에 대해 "아직 읽어 보지 않았다면 꼭 읽어 보라. 한 번 읽어 본 적 있다면 또 한 번 읽어 보라."하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다자이의 생전 바람에 따라 사후 모리의 묘소의 맞은편에서 오른쪽에 다자이의 묘소가 마련되었다. * [[박경리]]는 [[김용옥]]과의 일본에 대한 관점에 대한 논쟁 중에서, '일본의 문화는 야만'이라고 주장하면서 근현대 소설 중에서 모리 오가이의 작품이 그나마 읽을 만하다고 언급했다. * 모리 오가이는 3남 2녀를 두었는데, 요절한 차남 후리쓰[* 不律. 독어로 쓰면 프리츠(...)]를 제외한 4명의 자식들이 모두 모리 오가이에 관한 수필 내지 회고록 등을 썼다. 이 중에서 장녀인 마리(森 茉莉 : 1903년~ 1987년)가 쓴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와 차녀인 안느(小堀 杏奴 : 1909년 ~ 1998년)가 쓴 '만년의 아버지(晩年の父)'가 유명하다. * 모리 마리의 회상록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의 내용 중 일부는 이러하다. 어린 시절의 마리가 "파파, 놀아 줘, 놀아 줘!"라고 하면 모리는 피우던 담배를 놓아버리고서 마리에게 "그래!"라고 따뜻하게 대답하고서는, "마리는 훌륭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에 마리는 "아빠도 훌륭해! 아빠가 도둑질을 해도 훌륭해!"라고 말했다. 물론 모리가 도둑질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리가 어떠한 일을 해도 훌륭한 아버지인 점에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다. 또, 어린 마리가 슬퍼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있으면, 모리가 티슈로 마리의 눈물을 닦아주고서 마리의 눈물이 묻은 티슈를 햇볕에 비추어 보이면서 마리에게 "자, 이걸 보렴. 눈물 방울이 한 방울, 두 방울. 동글동글하지?"라며 슬픈 마리를 달래주기도 하였다. * 모리 오가이는 장녀인 마리를 끔찍이 여겼는데, 마리가 16세가 될 때까지도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혀놓을 정도였다고 한다. 마리를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마리는 최고, 마리는 최고, 눈도 최고, 눈썹도 최고, 코도 최고...”라고 주문을 외는 듯이 말하곤 했다. 그야말로 [[딸바보]]. 사실 모리는 마리가 아주 어릴 때 마리를 잃을 뻔했다. 마리가 5살이던 시절, 당시 일본 전역에 창궐했던 [[백일해]]에 감염되었다가 간신히 나았기 때문이다. * 자녀들에게 전반적으로 자상하고 따뜻한 아버지였다. 반면 아내인 모리 시게는 상대적으로 엄격한 양육 방식을 선호했다. 자녀들은 모리를 친근하게 "파파(パッパ)"라고 불렀다고 한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우에노 동물원]]에 자녀들과 함께 놀러가거나 자녀들을 데리고 도쿄의 유명한 소바 전문점에 방문하기도 했다고 한다. [[고쿄]]에 초청 받아 대접 받은 식사에서 디저트로 나온 초콜릿과 캐러멜을 몰래 군복 안에 숨기고 귀가하여 자녀들에게 기념품으로 건네주기도 하였다. 자택의 서재에서 소설을 쓰고 있거나 응접실에서 손님을 상대하고 있는 등 집에서 중요한 일을 하고 있을 때 이따금 어린 자녀들이 불쑥 들어오기도 했는데, 그럴 때마다 모리는 자녀들을 혼내기는커녕 응, 왔어? 하며 무릎 위에 앉히고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 한다. * 자녀들이 어릴 적 밤에 화장실 가기를 무서워하면, 모리가 화장실에 함께 가 준 후 뒤처리까지 도와주었다고 한다. * 모리 오가이의 장녀 모리 마리는 1957년 수필 '아버지의 모자(父の帽子)'로 데뷔한 뒤 장편 소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 『연인들의 숲(恋人たちの森)』 등을 발표하여 소설가로서도 이름을 올렸다. 『달콤한 꿀의 방(甘い蜜の部屋)』은 3부로 나뉘어 10년에 걸쳐 연재되어 1975년에 완결되었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연재되던 중 이 작품을 읽고 '어떤 음란한 여자보다도 그녀는 남자라는 존재를 알고 있습니다. 실로 기이하다!' 라는 말을 하며 '관능적인 대걸작'으로 높이 평가하였다. 그러나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할복 자살하였고([[미시마 사건]]) 결국 이 소설의 2부까지밖에 읽지 못하였다. * [[도쿄도]]의 [[분쿄구]]에 모리 오가이 기념관이 있다. * [[만쥬]][* 화과자의 일종으로 달콤한 소가 들어 있는 퍽퍽한 과자다.]를 얹은 [[오차즈케]], 일명 만쥬 차즈케를 좋아했다고 한다. 둘째 딸 코보리 안느의 회고록에 따르면, 모리 오가이는 청결하게 씻은 하얀 손으로 만쥬를 4등분하여 오차즈케에 얹어 주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 단것을 매우 좋아했다. 동시대의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와의 공통점 중 하나다.[* 나쓰메 소세키는 [[딸기잼]]을 대량구매하여 쌓아 놓고 퍼먹었다고 한다.] 다만 술은 마시지 않았다. 특히 "[[팥]]은 영양이 풍부하다"며 단팥을 좋아했는데, [[단팥빵]]을 최초로 만들어냈다고 전해지는 제과점 키무라야(木村屋)의 단팥빵을 즐겨 먹었다고 한다. --덕분에 각기병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는데도 각기병에 걸리지 않았다. 팥에는 티아민이 풍부하여 팥을 먹으면 각기병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 * [[큰 머리|머리가 컸다]]. 어린 시절 만났던 모자 장수가 그의 머리가 너무 커서 보자마자 폭소했다고 한다. 그리고 장녀 마리의 수필 '아버지의 모자'의 첫 문장도 "우리 아버지는 머리가 참 컸다"다. * [[단테 알리기에리]]가 집필한 [[신곡|Divina Commedia]]를 신곡(神曲)으로 번역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